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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PPORO
BIEI
삿로포, 아니 비에이는 알면 알수록 살고 싶은, 겨울이 오면 다시 한번 찾고 싶은 곳이었다. 비에이 투어라고 흔히들 말하는 크리스마스트리, 마일드세븐 나무, 청의 호수와 흰수염 폭포도 홋카이도를 매력 있게 만들었지만, 나는 오늘 소개할 이곳에서 온전히 마음을 빼앗겼다. 아사히 맥주가 생각나는 아사히 산이 그곳이다. 가는 길이 눈으로 험난했고, 이곳을 걸으려면 방한 부츠가 필수였지만 진정한 겨울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크리스마스트리 나무를 만나고 여운이 가시기도 전, 아사히 산으로 향했다. 렌터카를 빌려 여행하기에 남들과 같은 버스 투어 코스만 가기 싫어 전날, 여러 코스를 생각했고, 동선에 가장 적확한 아사히 다케(산)를 택했다. 결과적으로 아사히 다케를 택한 것은 잘한 선택이었다. 겨울 왕국이 있다면 이곳이겠구나 생각이 들게 했으니까.
아사히 다케는 가는 길마저 낭만이 있었다. 커다란 댐을 만날 수 있었고, 눈 덮인 산 아래로 차갑게 얼어붙고 있는 댐은 청주호를 연상케했다. 누군가 이곳을 들렸다는 흔적을 눈사람과 발자국으로 찾는 재미도 있었다. 우리도 그 흔적을 따라 눈사람을 하나 만들며 추억을 쌓았다.
댐을 지나 아사히 다케로 향하는 길은 험난했다. 비에이 구석구석을 여행하는 것도 눈길이라 어색함이 컸고, 어려운 일이었으나 아사히 산에 비하면 힘든 축에도 끼지 못하는 것이었다. 길은 구불구불 오르막길이었고, 전체적으로 눈으로 뒤덮여있었다. 지나가는 차도 많이 없고, 잘 오지 않는 도로임이 분명해 보이니 어려움이라는 글자에 공포라는 글자가 추가되었다. 과연 이곳을 가는 것이 진정 옳은 걸까라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돌이킬수도 없었다. 그저 목적지를 향해 가는 방법밖에는. 목적지까지는 약 8km를 구불구불한 길을 통과해야했다. 시속 30km가 될락말락한 속도로 천천히 올라 도착한 목적지. 그곳에서 우리는 그럼에도 잘 왔다는 생각을 가졌다.
아사히다케는 홋카이도 카미카와군 히가시카와정에 있는 산이었다. 히가시카와라고 말하면 조금은 낯선 기분이 들지만, 비에이와는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다. 아사히다케는 홋카이도 내에서도 최고봉에 해당한다. 고도는 현재 2,291m로 한라산보다 더 높은 곳에 위치한다. 아사히다케는 특히 여름에 등산객들에게 인기가 많은데, 로프웨이를 통해 쉽게 산 중턱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겨울엔 스키와 스노보드를 즐기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이다.
아사히다케 로프웨이를 타는 곳에 도착했을 땐 이미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주차장에는 차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곳을 목적지로 올라갔을 때만 하더라도 차량이 많지 않았는데, 도착해 보니 이곳에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원래의 목적은 아사히다케의 로프웨이를 탑승하고, 산 중턱까지 올라가는 게 목표였다. 하지만, 12월 초에는 로프웨이가 운영되지 않았고, 12월 15일 이후부터 운영이 된다고 했다. 목적을 잃으니 방향을 상실한 나침반처럼 혼돈이 찾아왔다. P들에겐 하나의 목표 이외엔 다른 목표를 정하지 않으니까. 로프웨이를 탑승하지 못한다면, 무얼 할 수 있을까? 여기에 많은 사람은 무얼 하는 걸까? 궁금해졌다.
사람들에게 물으니, 절반은 안전 교육을 받으러 왔다고 했다. 공무원인지, 소방관인지 모르겠으나 그런 계통의 사람들 같았다. 응급처치부터 시작해 다양한 교육을 받고 있었다. 절반은 이곳을 트래킹 한다고 했다. 여기 아사히 산은 트래킹 하기 정말 좋은 산이라고 했고, 초보자들에게도 어렵지 않은 코스들이 많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트래킹을 할 수밖에 없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원래도 걷는 것을 좋아하지만, 겨울 눈이 가득한 이곳을 걷는다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최고의 트래킹이 될 것만 같았으니까.
트래킹을 시작하려고 하니, 직원 한 분이 나와 지금 신고 있는 신발로는 트래킹을 할 수 없다고 했다. 이유를 물으니 이곳에 쌓인 눈들이 생각보다 높고, 푹푹 빠져 신발이 다 젖을 거라고 했다. 동상에 걸릴 위험이 있어 트래킹을 할 수 없다 말했다. 초라해진 에어 포스 1을 바라본 뒤, 어떻게 하면 되냐 물었다. 직원은 방한 신발이 있으니 그걸 빌려 신고 가라고 했다. 신발 대여는 400엔. 꽤나 합리적인 금액이었지만, 굳이 빌려야 할까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허튼 곳에 돈을 쓰고 싶지 않았기에 더 그랬다.
직원의 말을 듣기 정말 잘했다. 일본은 허튼 말을 하지 않는 곳이었다. 만약 초라한 에어 포스 1을 신고 호기롭게 트래킹을 시작했다면, 얼마 안 가 다시 돌아왔을 것이다. 발목 이상으로 푹푹 빠지는 눈길을 뚫고 가야 하는 트래킹이었기에 방한 부츠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코스 이름도 그냥 트래킹 코스가 아닌 <아사히다케 크로스컨트리 스키 코스>였다. 스키를 타고 가는 트래킹 코스를 일반 운동화를 신고 가는 멍청한 짓을 할 뻔했던 것이다.
방한 장화를 신고, 가장 짧고 쉬운 2.5km 코스를 택했다. 시간이 많지도 않았거니와 눈길 트래킹은 처음이라 쉬운 코스를 택했다. 온통 하얀 눈의 세상, 초록 크리스마스트리에 소복이 쌓인 눈은 우리를 에스코트했고, 조금씩 보이는 발자국은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방한 부츠를 신고 걷는 게 여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하얀 눈은 동심의 세계로 초대했고, 평소 잃어버렸던 순수성을 꺼내주었다. 시린 손에는 눈 뭉치가 들려있었고, 앞서가는 친구에게 던져댔다. 그렇게 시작된 눈싸움. 트래킹을 하며 우리는 10대 어린 소년으로 돌아갔다.
트래킹을 하며 만난 붉은색들. 하얀 캔버스 위에 그려진 빨간색 정지 간판과 하늘에 떠있는 도로 중앙분리대, 트랙터까지 온통 빨강이었다. 그리고 그 빨강은 트래킹 내내 친구처럼 다가왔다. 한 시간 정도 소요된 짧은 트래킹. 걷는 동안 눈이 가득 쌓인 곳에 누워 천사도 만들고, 나무에 소복이 쌓인 눈을 흔들어 맞기도 하고, 추억의 시간을 이곳 아사히다케에서 경험했다.
아사히다케는 삿포로를 여행을 더 풍성하게 채웠다. 투어로는 방문할 수 없는 아사히다케. 렌터카 여행을 했기에 찾을 수 있었던 이곳은 우리의 여행을 더 깊고, 더 순수하게 채워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