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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한반도를 식민지화했다. 35년간의 일제 강점기는 한반도 곳곳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국내 여행에서 만나는 식민지의 잔해는, 여전히 아물지 않은 현재진행형으로 우리를 아프게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단채 신채호 선생님의 명언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생채기로 남은 역사 유적지를 여행하는 마음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아픔과 상처다.
목포 여행길에 오르는 마음도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맛있기로 소문난 남도 음식의 본고장에 왔다는 기대보다 아픈 역사를 직면해야 한다는 용기가 더 컸다.
목포는 1897년 부산, 원산, 인천에 이어 네번째로 개항(開港)한 도시다.
다만 목포가 앞선 개항도시와 다른 점은 고종의 칙령으로 개항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자주적 개항'이라 불린다. '자주'라는 말이 꽤 그럴싸하게 보이지만, 결국은 목포 또한 일본의 수탈의 발판일 뿐이었다. 일제는 쌀, 목화 등 국내 수많은 물자들을 목포항을 통해 본국으로 가져갔다. 유달산을 중심으로 일본의 거주지가 형성되고, 적산가옥이 지어졌다.
동양척식회사도 세워졌다. 목포 동양척식회사의 경우 전남 각지의 17개 농장을 관리했는데 국내 동척 중 가장 많은 소작료를 거뒀다 한다. 그로 인한 목포 시민들의 삶은 처참했다. 그들은 목숨을 내걸고 일제에 맞섰다. 학생, 노동자, 농민 들의 항일운동이 숱하게 일어났다.
목포역 근처에는 일제시대 건축물이 남아있는 근대화거리가 있다. 아픈 역사의 한 단면이지만 지금은 문화재로 가치가 높다. 그래서 목포 근대화거리는 지붕없는 박물관이라 불린다.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될수밖에 없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잊지 않아야 역사는 발전하는 법이다.
가장 먼저 목포 근대역사관을 찾았다. 1, 2관이 있는데 1관은 일본영사관, 2관은 동양척식주식회사였다. 하나의 입장권을 구입하면 두군데 다 볼 수 있다. 1관은 목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1898년 일본 영사관이었다가 광복이후 시청과 문화원으로 사용됐다. 푸른 숲에 둘러싸인 아담한 붉은 벽돌 건물이 아름다워 드라마 촬영 장소로도 쓰였다.
전시관에는 일제 시대 목포의 모습을 비롯해, 독립 운동의 생생한 현장을 보여주는 기록들이 다채롭게 전시되어 있다. 이 중 전남 의병들이 체포된 뒤 찍은 사진에 한동안 시선이 꽂혔다. 이들은 이 사진을 촬영한 뒤에 모두 죽음에 이르렀다고 한다. 변변한 무기도 하나 없이 맨 몸으로 일제에 맞섰던 이들의 용기에 숙연해진다.
2전시관으로 향하기 전 방공호를 찾았다. 1전시관 뒷편에 있어 놓치기 쉬운 장소지만 꼭 가봐야 할 곳이다. 일제는 태평양 전쟁시절 군수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이곳을 만들었다. 많은 한국인들이 이곳에 갇힌 채 인간이하의 삶을 살았다. 동굴 한 켠에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단어가 적혀있다.
'어머니 보고 싶어'
근대역사관 2관은 1관에서 5분이면 도착한다. 동양척식회사로 쓰인 건물 답게 전시실 입구에 공을 던져 동양척식회사를 파괴하는 게임이 있다. 있는 힘껏 공을 잡고 던져 동양척식회사를 폭파시켰다. 100여년 전 의병들이 하고 싶었던 일을 대신 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통쾌하다.
동양척식회사는 일본인 지주의 금융과 부동산 지원을 위해 설립한 기관으로, 한마디로 한반도 경제 침탈의 본부였다. 1908년 서울과 부산, 목포 등 8개 도시에 생기며 자원 수탈 첨병 노릇을 했다. 현재는 부산, 대전, 목포에 남아있는데 그 중 목포가 가장 크다. 2관 역시 일제시대 당시 목포의 모습과 항일운동에 대한 다양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문구를 마음속에 담으며 다시 길을 걸었다.
푸른 숲으로 둘러싸인 목포근대역사관 1관
정명여학교 선교사 사택 천장에서 발견된 독립가
체포된 뒤 찍은 전남지역 의병장들
방공호 입구
동굴벽에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단어가 적혀있다. '엄마 보고싶어'
근대역사관 2관
근대역사관 2관에서 5분 가량 만호동 언덕을 걸어가면 소년 김대중 공부방이 나온다.
김대중 前대통령은 1936년 보통학교 4학년때 목포로 이사했다. 김대중의 어머니는 이곳에서 여관을 운영하며 1945년까지 소년 김대중을 뒷바라지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는 '인동초'라는 별명이 있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한국 민주화의 상징이 된 김대중의 삶이 모진 찬바람과 서릿발 얼음 속에서 피어나는 인동초와 닮았기 때문이다.
1층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인생이 담긴 사진과 편지, 저서 등이 전시되어 있다. 좁은 계단으로 2층에 올라가면, 소년 김대중의 공부방이 나온다. 목포앞바다가 보이는 창문 옆에는 그가 인생에서 몸소 보여준 '행동하는 양심' 글귀가 적혀있다.
회고록을 보면 당시 소년 김대중은 목포 앞바다 풍경을 보며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세상에 이런 도시도 있었구나
배마다 꽃아 놓은 깃발이 힘차게 펄럭이고
뱃고동 소리가 울렸다.
모든 것이 신기하고
목포는 가히 별천지였다'
소년김대중공부방
2층에 올라가면 소년 김대중이 공부했던 쪽방이 나온다
소년김대중 공부방 맞은편에는 목포진 역사공원이 있다. 호남, 경남지역으로 통하는 세곡 운반로와 해상 방어의 요충지로서 세종 21년(1439년)에 처음 설치됐다. 이후 1987년 목포항이 개항하며 일부 건물들이 관청으로 쓰이다가 훼손됐다. 목포라는 지명이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한 시점이 목포진 설치와 맞물려, '목포역사의 시작점'으로 불린다.
목포진 역사공원
목포 근대화 거리의 카페나 식당은 겉모습은 적산가옥(敵産家屋)이지만 내부는 요즘 스타일로 잘 꾸며놓은 반전매력이 있다. <미스터 썬샤인>의 글로리호텔에 온듯한 고풍스러운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고 다시 거리로 향했다.
현재는 미식문화갤러리로 재탄생된 목포 세관, 일본인들이 다니던 기독교회, 옛 법원과 검찰청터까지 목포 근대화 거리를 걷다보면 수많은 역사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눈으로만 보는 데 그치지 않고 가슴으로 느끼고 공감하는 여정이 목포 여행의 매력이다.
적산가옥을 개조한 식당, 카페등이 많다
(구)목포세관
법원, 검찰청 터